한신과 기장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하기 위해서 장공 김재준이 필요한 이유
한신과 기장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하기 위해서 장공 김재준이 필요한 이유...
# 내년이면 장공 김재준 목사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올해 한신대학교 80주년을 맞이해서 한신대학교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 그리고 202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70주년을 맞이해서 교단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교단과 학교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한신대학교의 80년과 한국기독교장로회의 70년은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그 분들을 기억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며, 우리의 미래 세대에 제대로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 한신대학교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출발과 장공 김재준 목사
우리가 알다시피 한신대학교는 김대현 장로님의 재정적인 후원과 송창근 목사님이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추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당시 만주의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로 내려와서 학교를 세우는 것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 김재준 목사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젊었을 때 막연하게 꾸었던 교육에 대한 꿈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부분에서 일제의 간섭이 더욱 심할 것이라는 무게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평양신학교는 신앙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학교를 폐쇄했는데 조선신학교를 개교한다는 것은 구설수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80년을 맞이한 한신대학교는 오늘날 어떤 모습일까요?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당시 교권의 정치세력이 조선신학교를 장악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으로 생겨났습니다. 목사 자격 박탈이라는 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소신을 지킨 김재준 목사님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김재준 목사님과 함께 새롭게 교단을 출범시킨 신앙의 선배들 역시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을 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단이 생기고 학교가 생기는 것이 상식이지만,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먼저 학교가 있었고 그 뒤에 교단이 생긴 것입니다. 학교는 교단의 간섭에서 최대한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은 그 이후 한신대학교와 한국기독교장로회 사이의 미묘한 갈등을 야기시키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학교와 교단간의 정치적인 갈등이 아닌 학문적인 탐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교단의 목회자들이 학교를 지켜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는 교단 내에서는 관점의 차이로 쉽지 않지만, 학교에서 학문적으로 논의하는 것은 최대한 보장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교단, 다른 학교는 논의 자체가 절대 불가라는 사실입니다.
# 장공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신대학교와 한국기독교장로회, 그리고 역사를 바라본다
오늘날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의 모습은 과거 기라성같은 어른들과 스승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으며, 그 중심에 장공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장공은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서 하나의 기준점을 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준점이 된다는 점에서도 기준점이 없는 다른 교단과 학교 보다는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혼자서 만들어갈 수 없습니다. 장공이 살면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의 개인적인 삶을 살고 있었지만 장공과 만나면서 장공과 함께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러한 함께하는 삶들이 모여서 한신대학교의 역사를 만들었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역사를 만들었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고백한 김재준 목사님이 만나고 교제했던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역사에 상당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에게 세례를 베푼 김영구 목사님은 그 이전에 만주 용정에서 ‘김철’이라는 이름으로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는데, 문익환 목사님의 아버님인 문재린 목사님의 결혼 때 축사를 하신 분이었다고 합니다. 김재준 목사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고 할 때, 차비가 없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신 분은 조승제 목사님으로 우리가 잘 아는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님의 조부가 되는 분입니다. 미국 유학 후에 김재준 목사님을 스카웃하려던 신성학교 교장은 장이욱이라는 분인데 이후 제2공화국 시절 주미 대사로 활동하기도 하였고, 5ㆍ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군사정권은 정당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사직을 사임하기도 한 분입니다. 김재준 목사님은 당시 숭실대학교의 학장이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설득하는 것도 마다하고, 당시 ‘간도 대통령’이라고 불리던 김약연 목사님이 활동하는 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장공의 모습을 올바르게 그린다면, 자연스럽게 교단과 학교의 역사도 올바르게 그려질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장공을 역사 속으로 이끌어낸 만우의 존재도 부각될 것이고, 장공과 함께 격동의 역사를 거닐었던 많은 분들도 더 이상 외롭게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 장공 김재준 목사 탄생 120주년,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장공의 기억이 존재하는가?
내년이면 장공 탄생 12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동안 장공과 함께 했던 1세대와 장공에게 배웠던 2세대의 장공에 대한 사랑과 헌신 덕분에 장공이 잊혀진 존재가 아니라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남아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려스러운 것은 1세대와 2세대의 열정보다 부족한 우리의 세대가 얼마만큼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공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침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안고 있지만, 나름대로 장공을 지금의 시대에 알리기 위해서 장공기념사업회는 ‘학술위원회’, ‘편집위원회’, ‘장학위원회’를 통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장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그리고 장공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출발한 ‘장공기념사업회’가 그동안 주어진 환경과 여건 속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선배들이 걸어왔던 예언자적 행진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오늘날 교회와 목회자가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있지만, 과거 기장과 한신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간다면,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모습에서 진정성을 발견한다면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 미래를 향해 나가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장공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러한 희망이 구구절절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아니면 그 누가 장공을 이야기할 것이며, 한신대학교가 아니면 그 누가 장공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이 역사 속에서 희망의 비전을 선포할 수 있는 교단과 학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